아테네의 지식인들은 포도주와 함께 철학을 논했고, 소아시아의 도시 에리트라에는 ‘한번 맛보면 다른 술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찬사를 받은 포도주가 존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테오프라스투스가 언급한 이 에리트라에산 포도주는 델로스 동맹을 통해 아테네로 납품되며 당대 최고로 평가받았다. 암포라에 담긴 이 술은 물과 희석해 마시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이로부터 ‘같이 마신다’는 뜻의 ‘심포지엄’이란 말이 유래했다.

이러한 문화적 풍경은 최근 출간된 역사서 '바다가 삼킨 세계사'(다산초당)를 통해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작가인 데이비드 기빈스는 이 책에서 세계사 곳곳을 바꾼 12척의 난파선을 연대기 순으로 다루며, 바닷속에 잠긴 유물들을 토대로 고대 문명의 면면을 생생히 복원한다.

1996년 튀르키예 남부에서 발견된 ‘텍타쉬 난파선’에는 아테네로 향하던 중 좌초된 것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포도주 관련 유물들이 실려 있었고, 이는 에리트라에산 포도주가 고대의 중요한 무역품이자 공물로 기능했음을 뒷받침한다. 이뿐 아니라 저자는 선사시대 도버 해협을 건넌 '도버 보트', 당나라 문물이 서역을 거쳐 유럽으로 전파되는 과정을 담은 '밸리통 난파선' 등 유적을 통해 문명의 교류와 충돌을 조명한다.

책은 또 로마 제국이 세베루스 황제의 무리한 군비 확대와 은화 가치 절하로 몰락의 길을 걷는 과정도 함께 다룬다. 저자는 이를 오늘날의 미국 재정 구조와 비교하며 “빚으로 운영되는 패권의 위기”라는 날카로운 비판을 던진다.

'바다가 삼킨 세계사'는 단순한 유물의 나열을 넘어, 해저에 묻힌 보물로 고대인의 삶과 문명의 전환점을 풀어낸다. 역사, 경제, 예술사를 종합적으로 아우르는 이 책은 독자들에게 수천 년을 뛰어넘는 지적 항해의 즐거움을 선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