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도 무대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린 연극 ‘더 드레서(The Dresser)’가 27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막을 올렸다. 이 작품은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영국 극작가 로널드 하우드의 대표작으로, 1942년 영국의 한 지역 극단이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공연하기까지의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작품은 공연 직전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진 주연 노배우 ‘선생님’과, 그를 무대에 세우기 위해 분투하는 전속 의상 담당자 노먼의 시선을 따라 전개된다. 공습경보가 울리는 위기 속에서도 공연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이들의 모습은 배우가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치열한 과정과, 그 뒤에서 헌신하는 스태프의 존재를 조명한다. 노배우가 마침내 무대에 올라 ‘리어왕’의 첫 대사를 읊는 순간, 객석에서 터져 나오는 박수와 환호는 관객에게 깊은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첫 공연에서 ‘선생님’ 역을 맡은 정동환은 무대 위의 위엄과 무대 아래의 나약함을 오가며 노배우의 복합적인 내면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60년 연기 경력의 무게를 증명하듯 긴 대사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소화해 관객의 몰입을 이끌었다. 노먼 역으로 네 시즌 연속 무대에 오르고 있는 오만석은 헌신과 질투, 애정과 허무가 교차하는 인물을 노련하게 그려내며 극의 중심을 단단히 잡았다. 극단의 만년 조연 제프리를 연기한 유병훈 역시 절제된 연기로 전쟁과 세월 앞에 놓인 배우의 현실을 담담히 보여줬다.

이번 시즌은 더블 캐스팅으로 구성돼 서로 다른 해석의 무대를 비교해보는 재미도 있다. 28일 오후 공연에는 ‘선생님’ 역에 박근형, 노먼 역에 송승환, 제프리 역에 송영재가 출연해 또 다른 앙상블을 선보인다.

무대 연출 역시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백스테이지와 분장실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장면은 순식간에 ‘리어왕’의 무대로 전환되며, 관객은 연극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게 된다. 특히 관객이 무대 후면에 앉아 극중극을 바라보는 장면은 공연 제작의 이면을 체감하게 하는 인상적인 장치로 작용한다.

다만 독일군 폭격을 표현한 장면에서 강한 폭발음과 조명이 사용돼 일부 관객이 놀라는 모습도 보였다. 사전 안내가 있었지만, 공연 전 분위기 속에서 이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관객이 적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연극 ‘더 드레서’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예술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헌신과 연대를 통해 무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공연은 내년 3월 1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이어진다.